"남북 이념 갈등"이 한인 이민교회에 어떤 갈등을 야기해 왔는가, 그 원인은 무엇이며 이 갈등을 우리는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 들여왔고 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가, 또한 이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로 나아가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가, 이 화해를 하는 위한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이며, 또한 화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이야기하겠다. 너무 벅찬 주문이지만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 목사로서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 오늘 이 자리에 섰다.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 (이 부분은 글쓴이의 다른 글로 옮겨졌다)
분단으로 인한 갈등과 우리의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념 갈등과 화해의 삶을 위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조명해 보고, 넓게는 통일된 조국을 가져오기 위해서 좁게는 갈등 해소를 위한 우리의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어제: 조국의 분단과 한국교회
분단 된지 61년, 우리의 어제는 분단으로 인한 고난의 역사다. 분단의 역사를 바로 인식할 때 오늘의 우리를 직시할 수 있고 또한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남북분단 시도는 1592년 왜구의 침략 때였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남부의 4도를 일본이 차지하고 북쪽의 4도를 이씨조선이 차지하는 남북분단을 제안했다. 그 때 조선왕조와 명나라가 반대하였고, 물론 왜구와 사력을 다해 싸웠다. 결국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어 조선은 외국군대의 침입으로 인한 남북분단의 첫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다시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1896년 38선 분할제안이 있었다. 그 때 북쪽에서 내려오는 제정 러시아의 접근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38선 이북은 러시아가, 38선 이남은 일본이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러시아가 거절하였다. 다시 1898년 로일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 러시아는 39도 선을 그어 북조선을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였고, 1903년 일본은 서만 국경 남북 5마일을-전체 10마일-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나라는 분단되지 않았으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과 경제권을 빼앗기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통탄할 일은 선교를 위해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일본의 조선침략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규정한 것과 이미 을사조약이 있기 4개월 전 가쯔라-태프트가 만나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지배를 미국이 묵인하는 내용을 담은 밀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하의 조선인들은 많은 희망을 미국에 두었다. 독립협회운동의 지도자 서재필, 윤치호 등은 모두 기독인이었고 미국식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타계적인 신앙으로 도피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도 많이 있었지만 출애굽의 역사와 부활의 역사를 믿고 나라와 민족의 해방을 찾으려는 애국적인 지도자들과 교인들도 있었다.
2차 대전 후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지만 38선은 그어졌고 남한에는 미군정이 북한에는 러시아군이 들어왔다. 이 때 맥아더의 포고문은 점령지의 치안과 질서유지의 이름으로 "명령, 포고 지시를 거부한 자 또 연합군에 대해 적대행위를 한 자는 점령군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결정하고 이를 사형 또는 기타 형벌에 처한다"고 했다. 조선은 점령지였다. 해방으로 축하 받을 나라도 아니었다. 장기천 감독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러시아군의 횡포를 보고 남하했지만 소련군 사령관은 "조선 인민이여, 소련과 연합군은 조선으로부터 일본침략자를 추방하였다!"로 시작하여 "조선은 자유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 조선사의 첫 페이지에 불과하다. 조선의 행복을 조선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근면한 노력에 의해서 지켜야 한다. 조선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손안에 있다. 어머니 나라 조선의 애국자가 되고 충실한 조선인이 되시라.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로 포고문을 맺었다. 현격한 차이의 포고문이다.
이 중대한 시기에 교회들은 오히려 단독정부가 세워지기 전 통일된 교회를 포기한 총회를 치렀다. 또한 정치적인 이유로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이기적인 자파의 득세를 위해 분열했다. 통일정부의 꿈은 무산되고, 48년 8월 15일 남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고, 9월 9일엔 북에서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통일정부를 꿈꾸던 좌파 김창준 목사는 월북하였고, 목회 초년병시절 이상적인 목사로 여기던 김재준 목사는 해방직후 공산주의를 포함한 통일된 정부를 주장하였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우려를 벗지 못하고 후에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통일의 꿈을 꾸었으나 북을 방문할 수 있었음에도 끝내 북을 방문하지 못했다. 민주화를 넘어 통일의 새 지평을 제시하지 못한 채 그가 소천한 것은 심히 유감이다.
단독정부가 세워진 이래 전쟁을 겪었다. 돌이켜보면 이는 동 서 냉전의 대리전쟁이었고, 민족의 큰 불행이었다. 전쟁으로 남북의 증오와 불신은 배가되고 더 굳어졌으며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반공사상은 굳어졌고 북에서 나온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반공사상을 고착시켰다. 교회협의회(NCC)는 휴전협정 한 달 전 6월 15일 통일구국을 기원하는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성명을 발표했다. "얄타협정으로부터 미소 공위까지의 역사와 6.25 사변으로부터 판문점 휴전회담까지의 경험으로 얻어지는 근본적이며 종합적인 우리의 결론은 우리는 공산주의와 유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에 그들은 폭력을 내놓고, 우리가 사랑을 구할 때에 그들은 증오를 가르치고, 우리가 자비를 말하면 그들은 무자비를 토한다. 그들과의 타협을 권고하는 것은 광야 사십일 간의 시련에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마귀와의 타협을 강요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이러한 유화의 결과로 올 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박해며, 민족운명의 파멸이며, 세계질서의 파괴이며, 인간 양심의 종언일 따름이다."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 89-90쪽)
공산주의는 "설복될 수 없는 마귀", "영구히 회개할 수 없는 마귀"였다. 그러기에 북진통일이 대세였고, 북진통일을 제외한 통일논의는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매도되었다. 휴전을 앞두고 휴전을 반대하며 "유엔은 공산주의를 말살시키고 '정의와 양심의 권위'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절대 적처럼 되었다.
이어 4.19 혁명이 일어나 민주당정권이 들어서고 곧 5.16 군사쿠데타로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 때 대부분의 교회는 침묵했다. 소수 교회와 지도자들이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하였지만, 이때 많은 교회들은 대규모 집회를 통해 수적으로 부흥했고, 기복적인 교회, 하면 된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교회를 중심으로 팽창일로를 걸었으며, 민족적 양심을 지키려는 교회, 정의와 평화를 원하는 교회는 핍박을 받았다. 기복적, 피안적, 종말적 교회는 어깨를 펴고, 조용기 목사는 TV에 나와 3선 개헌을 선전했다.
세계교회에서는 공산주의와의 공존하여야 한다는 모임이 나왔지만(1954년 제 2차 세계교회협의회, 에반스톤) 공산국가의 대표들도 참석한 이 자리에서 장로교측 한국대표 명신홍, 김현정, 유호준은 공존불가를 내세웠고, 1957년 미감리교 전국 청년대회에서 공산국가인 중국의 유엔가입을 찬성하는 결의문이 발표되자, 한국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반대 결의문을 채택했다.
1966 년 한국기독교 반공연맹이 창립되고, 1968년 7월 웁살라 WCC 대회에서도 중국을 비롯한 미가입국들의 유엔가입 반대와 월남전에 참가하는 미국, 한국, 뉴질랜드 등을 규탄하는 결의안 상정이 부결되도록 한국대표 강원룡, 변홍규 목사는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하지만 60년대 후반 새로운 흐름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홍현설의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 조향록과 강원룡의 인간존엄 강조, 이어 박상증은 "살기 위한 남북통일"에서 전쟁이나 반공이 아니라 평화공존이 살길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북에 교회가 없다면 문제는 공산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에 있다고 주장했다.
70년대를 가리켜 우리는 '선민주 후통일'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박형규 목사는 "한반도의 미래와 교회의 선교자세"란 글에서 교회의 "자기개혁"을 주장하며 "남한의 교회는 사회의 불의한 현실을 고발하고 버림받고 멸시 당하는 군중을 모아 신국운동을 전개한 예수의 집단이 아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바리새파에 더 가까운 집단이 되어 버렸다. 시내의 웅장한 교회당들은 중산층의 점잖은 사교장과 양심 무마의 값싼 요양원으로 되었고, 교회가 외면한 하층대중들은 강렬한 마취제를 공급해 주는 신흥종교와 신비경험을 찾아다니거나, 실의와 자포자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반도의 장래는 실상 이 영세대중들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고 그들의 선택에 따라 교회의 장래도 결정되는 것이다." (기독교 사상 (1971년 9월) 그는 신학의 재무장,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악을 역설하며 남북대화를 위한 교회의 준비를 역설하였다.
1972년 7.4 공동성명이 나왔지만 이는 군사정권의 선전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교회기구 전체는 아니지만 개별적인 인사들을 통해 통일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1978년 문익환 목사는 "민주회복과 민족통일"이라는 글에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은 본래 하나의 문제임을 피력하였다. "남한의 민주화는 민족통일의 첫 단계이지 앞 단계는 아니다. 민주화와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을 통일하는 일은 같은 작업의 연속이다"고 말하였다. "민족통일을 전제하지 않는 민주화는 반민족적이요. 반민주적이 될 소지가 있다" 그는 통일된 상태에서만 국민의 자주적인 주권행사가 시행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어 1980년 3월 한국기독교 장로회: "통일은 교회의 선교적 과제," 1981년 6월 제4차 한/독 교회협의회 공동성명, 1981년 6월 "한국교회의 통일론"-민중의 참여가 강조되었다.
(주재용, 안병무 등), 1982년 교회협의회 "통일문제연구원운영위원회" 상설기구 설립, 1983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문제협의회 취지문에서 "통일에의 길은 전민족적인 과제이므로 전 민족이 참여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서 논의되고 협의되고 이룩되어야 한다"고 주장, 이어 1985년 2월 제34회 총회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 채택, 1986년 제37회 총회에서 예수교장로회(통합)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선포하고 분단과 통일문제 언급, 1988년 2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 나왔다. 이 선언은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 왔던 일이 죄악임을 고백하고 통일의 기본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 첫째, "통일은 민족이나 국가의 공동선과 이익을 실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어야" 하며 둘째, 통일논의에는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족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며 특히 분단체제하에서 가장 고통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 구성원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의사결정과정에서 늘 소외되어 온 민중의 참여는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주목할 것은 이 선언이 평화체제의 수립이라는 전제하에 미군철수와 군비축소를 주장한 점이다. 물론 보수적인 기독인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1990년대는 더욱 통일논의가 꽃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였으나 정상회담을 앞두고 1994년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서거했다. 이는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김영삼정부는 조 문파동으로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보수적 교회들도 북한돕기에 적극 참여하였고, 드디어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여 세계를 놀라게했다. 이 남북공동선언은 첫째, 통일문제를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둘째,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공통성 이 있음을 인정하고, 셋째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풀어 나가고, 넷째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 하고, 다섯째, 이 협의를 실천하기 위해 당국대화를 개최하기로 하고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이 선언은 교류, 협력을 증진하여 통일을 앞당기고자 하는 민족의지의 선포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6.15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어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바는 민족의 분열이 사회와 교회의 분열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교회는 시대의 등불과 양심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였으나 언제나 남은 소수자들이 있어 예언의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통일의 열기도 더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2. 오늘: 분단으로 인한 교회의 갈등
미주 통일운동의 선구자 가운데 한 분인 홍동근 목사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했으니 "민주화운동을 할 때는 교인이 200이더니 통일운동을 하니 교인이 50으로 줄더라"고! 1981년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통일대화 10년을 회고하는 책자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에서 그는 "회고하여, 통일대화 10년의 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민의 정착을 위해 한편 노동하며, 조국의 통일을 위해 또 한편 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위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수는 "자기 집안식구"였다. 본국정부의 악선전과 동족의 박해가 따르고 또 CIA 의 유혹과 위협이 그치지 않았다. 빨갱이, 친북분자, 반국가세력 등의 누명을 쓰고 투쟁을 지속하는 것은 가시밭길이었다. 교회의 성직을 빼앗긴 교수가 있고, 어버이 초상에도 고향집에 돌아가지 못한 동지들이 있었다. 운동도상에서 물러간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개인적 체험으로도 인권과 민주를 말할 때 200교인이 모였으나,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설교했을 땐 50으로 줄었다. 진리는 고독했다." 적었다. 빙긋이 웃기를 잘하며 한 번 입을 열면 그칠 줄 모르고 열변을 토하던 그 분도 통일을 보지 못하고 간 지 벌써 수년이 흘렀다. 일찍이 영락교회 부목사를 하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와 책자를 번역하여 소개한 그는 북부조국을 처음 방문 한 후 "미완의 귀향일기"를 남겼다. 그는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육체적으로 온전한 귀향이라 하겠지만 아직도 조국은 완전히 통일되지 않았기에 나는 비록 고향에 묻혔어도 미완의 귀향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남과 북은 예전에 비하면 통일의 길에 훨씬 가까워졌다. 비록 부시 대통령 취임 이후 통일의 길이 늦춰지고 북녘의 동포들이 더욱 배를 욺켜 쥐고 고난의 행군을 했지마는 그래도 성령의 역사는 막을 수 없어 통일의 길은 더욱 활짝 열리고 가까워졌다. 배를 타고 금강산을 가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육로로 하루 만에도 남녘 동포들이 북녘의 금강산을 다녀 오는 시대가 되었다. 인적 교류가 몇십배, 몇백배로 늘었고 물적교류가 늘어, 남북협력 사업으로 이제는 개성공단에서 남과 북 형제 자매들이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저들 가운데서 남남 북녀가 만나 결혼할 날도 가까워 오고 있다. 비록 옛기득권당 한나라당이 득세하는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이 남녘 정부가 마치 빨갱이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이 말하지만 그리고 남쪽 전반에 수만의 간첩이 깔렸다고 떠들지만 시대는 역시 6.15세대요 통일시대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다. 평택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분단하여 통치하려는 신보수주의 미국의 대외정책을 웅변하고 있으며 이를 지지하는 기득권자들의 소리가 높아간다. 그러나 이 역시 거룩한 영의 역사 앞에 머리 숙이는 날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부시의 대외정책은 미국의 위신을 떨어뜨렸고, 두 번의 전쟁으로 여러분과 저 모두 3만불이상의 빚쟁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지구상의 190여개 나라에 미국정부는 그중 130여개 국에 미군을 배치시켜 놓고 있다. 세계 각국의 1년 총 국방예산은 8천억 달러이며, 그 중 미국의 국방비는 약 반인 4천억달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숨겨진 비용"(Hidden Cost)까지 계산 하면 근래의 년간 국방비는 그 두배 8천억 달러이며, 미국 전체 연방예산의 2/3로 보도되고 있다. 미국은 인류사회가 서로 죽이고 죽이는 가장 파괴적인 행위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는 선두 주자인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택한 조국은 이 나라 건국조상들이 꿈꾼 이상적인 나라는 이미 아니다. 지금 미국의 군사주의와 세계화 경제정책은 인류를 죽이는 운동이다. "미국이 세계의 군사, 경제권을 장악하여 수퍼 파워로 등장한 이후 현재 인류의 5%가 세계의 부 95%를 차지하는 한편,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악화되어 인류의 20%가 하루 1달라 미만으로, 약 반수가 하루 2달라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방비 중 일년에 일천억 달러만 절약하여도 전 인류의 식량난, 실직난, 식수난, 문맹 문제, 건강문제 등 지구촌의 기본적인 난제들이 해결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미국을 위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울며 기도해야 한다.
석유매장량이 세계 2위인 이라크에서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은 엑손, 쉘, 모빌 등 미국의 석유대기업과 헐리버톤, 벡텔 등 건축대기업, 라키드 마틴, 보잉 같은 군사대기업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시정부와 결탁한 소수 대기업체의 이권을 위한 이라크전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정책과 군사주의의 관계를 세계 민중들에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예이다. 부시를 대통령으로 뽑은 크리스천벨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지금 기독교계를 강타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가 아니라 맘몬과 바알의 종교이다. 남은 자들이 없다면 곧 망하겠지만 이 땅에 의로운 남은 자가 있기에 희망이 있다. 그래도 솔직히 두렵다. 예수 없는 예수 교회가 될까 두렵다. 일찍이 불란서인 토코밸이 부러워한 교회강단의 외침이 사라져간다. 여러분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십시오." 참으로 값비싼 은총을 곱씹으십시오. 지금 미국엔 탈북자 이야기 요덕 스토리를 극화한 뮤지컬이 돌고 있다. 얼마 전엔 위조지폐 얘기로 북한을 옥죄었다. 얼마 전엔 북한인권을 위한 기도회가 대대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목적은 분할 통치에 있다. 계속 속국으로 삼으려는 의도이다.
3. 내일:
이것이 주된 오늘의 명제인데 너무 과거와 현재의 분석에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통일된 조국의 내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 있다. 통일은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꼭 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함을 위하여, 참다운 해방을 위하여, 한을 풀어야 하기에, 정희수 감독의 말을 빌리면 "가위눌린 삶에서 벗어나야 하겠기에..." 우리만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미국의 참된 해방을 위해, 동북아 평화 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명제다.
예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요즈음 통일되지 않고 지금대로 살아도 괜찮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희생이 있더라도 통일이 되어야 참된 부활의 날이 온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진수이다. 부활이 진수라고 하지만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고통 없는 환희는 없다. 조개의 아픔 없이 진주는 없다. 분단을 마감하는 우리 나라의 통일은 십자가의 아픔을 동반한다. 민족통일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민족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참여다. 희생을 감수하는 참여, 아픔을 동반하는 참여다. 힘들다. 고달프다. 언젠가 이승만 목사가 통일 운동하는 사람을 몸으로 다리를 만드는 사람들에 비유해 말한 것을 잊지 못한다. 통일의 개척자들은 다리다. 사람들이 그 몸을 짓밟고 넘어가기에 힘들고 괴롭고 아프고 지친다. 그러나 희생이 없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다. 통일 운동하는 이들에겐 육체적인 아픔도 있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많다. 외롭기도 하며, 때로 분노가 치솟는다. 그리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십자가는 가교다:
십자가가 다리이다. 예수께서는 다리가 되기 위해 성육신 하셨다. 사람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다. (빌립보서 2:5-11) 우리도 성육신 해야한다. 찾아가야 한다. 만나야 한다. 만나면 괴로움도 있지만 기쁨이 있다. 보람이 있다.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가교: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공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리 되는 길이다. 예수께선 이 땅에 오시어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예수님을 사랑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부족하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높이셨다. 눌린 자를 해방하셨다. 부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정의의 선포자요 실천자 이셨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교: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미주에 온 것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할 때가 있다. 북녘의 형제자매들과 동포들을 만날 때이다. 비록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라도 방문할 수 있는 것은 분단시대에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특권이다. 갈 때마다 우리는 거기 "우리들"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황석영씨는 북녘을 방문한 후 "사람들이 살고 있었네"라는 글을 썼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을 잇는 가교:
우리는 지금 이곳 미국에 살고 있다. 우리를 갈라놓은 나라, 지금도 계속 분단을 유지하려 철군을 하지 않는 나라, 가까운 과거에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키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오지 않고 지금도 계속 위협을 주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기에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는 능력을 상실한 미국인들에게 분단의 아픔을 갖고 사는 우리의 모습, 분단의 잔인함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불의를 저지른 미국, 자신을 보도록 가교가 되어야 한다.
남북을 잇는 가교:
남과 북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는 좋은 중매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다. 자유롭게 왕래하며 남북 모두 심리적인 불안과 쓸데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동족상잔의 전쟁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불신, 증오와 분노, 좌절과 불만으로 형제가 형제를 자매가 자매를 바로 보지 못하며 살아온 것을 넘어서야 한다. 많은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심지어 형님과 누이들마저 한을 안고 세상을 하직했다. 한은 풀어야 하는데, 풀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데 우리의 비극이 있다.
갈등 해결을 위한 결의문이나 타협, 조종을 넘어 변화를 위한 변혁이 있어야 하는데 많은 우리의 전통이, 관료주의가, 입과 귀를 막아 더욱 해결할 길이 없는데 우리 선조들, 우리 어머니들의 비극이 있다. 이제 우리는 말해야 한다. 아픔을 승화시키기 위해 털어놓아야 한다. 호소해야 한다. 눌러두어선 안 된다. 평신도들은 삶의 현장에서 목사들은 강단과 삶을 통해 아픔을 승화시키는 말을 해야 한다. 듣는 사람들이 귀를 열도록 공격이 아니라 우정 어린 설복의 말을 해야 한다.
상담심리학자 스위쳐의 말대로 말을 한 사람과 말을 들은 사람은 이미 예전의 사람은 아니라는 신념에서 공격적인 말이 아니라 서술적인 말을 해야 하고, 서로는 방어적인 자세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들어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지난 6 년 가까이 타인종목회를 하며 한국얘기가 신문에 나오면 교인들은 예외 없이 내게 물어 왔다. 이북에 대한 기사의 거의 100%는 부정적인 얘기였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보는 관점을 나누고, "나는 신문을 볼 때 문자 뒤의 것을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왜 그런 기사가 나오는 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군정시절 신문이 신문이 아니라 작문이 많았던 것처럼 정치인들은 신문을 선전도구로, 우민정책의 방편으로 쓰는 것을 보아왔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두 번의 전쟁을 통하여 보았기 때문이다.
9.11 이후 각지방에서 어떻게 상담자로서 교우들을 대하여야 하는 것을 얘기할 때 나는 전쟁의 부당성을 얘기했고, 헤어질 때 전에는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던 목사의 눈빛과 표정이 너무나도 다른 것을 보고 놀랐다. 역시 우리는 다른 적이 아니라 내 안의 적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고 느꼈다. 말해야 한다. 아픔을 얘기해야 한다. 패권주의의 잘못을 말해야 한다. 뉴욕타임스 저명한 기자의 말대로 왜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를 미워하면서 미국을 증오하는 지 생각하도록 말해야 한다. 인권, 위조지폐나 핵문제를 꺼내들고 미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얘기해야 한다. 성령께서 역사해서 우리의 어눌한 말, 그러나 진실한 말을 통해 일시적 해결이 아니라 정책의 전환까지 가져오도록 말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단으로 인한 갈등이 있을 때 서로의 다름을 먼저 인정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들어보려는 노력, 나를 비우고 들어보려는 노력, 나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같이 이기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비록 내 생각이 옳더라도 같이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아니고는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얘기해야 한다. 화해자는 내가 승리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금은동메달을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다. 함께 승리하도록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때 화해자는 승리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제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3-18)
마감하는 말:
십자가를 질 때 한 가족이 되고, 통일이 된다. 하느님의 식구가 된다. 십자가를 질 때 이리와 어린양이 표범이 어린 염소와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살찐 짐승이 함께 거하는 세상이 된다. 상함도 해함도 없는 세상이 된다.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값비싼 주의 은총, 십자가를 지는 제자됨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렇게 되는 꿈을 꾸고 참여해야 한다. 말로 글로 예술로, 삶으로 증거 해야 한다. "통일이 여 오라"는 기다림 만으론 부족하다. "통일을 이루자"는 결단과 행동을 요구한다. 운명으로 살지 말고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글쓴이: 백승배 목사, 웨스트몬트연합감리교회 CA
글쓴 날: 2006년 5월 15일
올린 날: 2006년 6월 15일
엮은이: 이 글은 2006년 5월 15일 베이커스필드 두레마을에서 열린 한인연합감리교회 통일위원회 제3차 화해사역자학교에서 발표한 글 중에서 개인의 여정에 대한 부분을 별도로 묶고, 분단과 교회의 화해사역에 대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글의 전문은 민족통신 www.minjok.com 에도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