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연합감리교회가 미국에서 104년의 선교역사를 가지고 오늘에 이르기 까지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흘린 땀과 헌신, 그리고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별히 개체교회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과 봉사를 해 온 여선교회 회원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여-선-교-회'는 이름 그대로 교회에서 선교를 위해 모인 여성들의 모임으로,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연약하고 힘없는 여성들을 도구로 쓰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를 이루어 나가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선교역사가 한국 여선교회를 통해서 일어났다.
1800년 후반 한국은 외세 열강의 간섭과 쇠퇴된 왕권의 부패, 그리고 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엄격한 신분제도와 성차별로 여성과 어린이들, 하류층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이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는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1884년 오하이오 주의 리벤나 지방의 여선교회 모임에서 한 익명의 여선교회 회원이 "어둠 속에 있는 한국의 여성들을 위한 교육사업과 복음 전파에 써 달라"며 적은 돈을 지정헌금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북 감리회 '감리교 여성 해외 선교사 공회'는 당시 오하이오 연회 여선교회 임원이었던 메리 스크랜턴을 한국의 첫 여선교사로 파송하여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또한 남 감리회에서도 1897년 조셉핀 켐벨을 첫 여선교사로 파송하여 캐롤라이나 주일학교 학생들이 보낸 선교헌금으로 '배화학당'을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의 노예문제로 감리교단이 남과북으로 갈라졌다.)
"한국여성들이 한국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보다 낳은 미래를 갖게 한다"는 목표아래 북과 남 감리회 여선교사들은 연합하여 여성지도자 양성을 위한 학교들과 여성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중 실시된 '전도부인' 사역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전도부인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불행한 삶을 살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고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 여선교사들이 그들에게 한글과 성경, 기독교 주요 교리를 가르쳐서 전도부인으로 양육하였다. 훈련을 받은 전도부인들은 지역사회로 흩어져서 기독교를 모르던 한국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인도하면 여선교사들이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경을 가르쳤다.
평양지역에서 첫 전도부인이 된 전삼덕은 양반여성이 예수를 믿는다고 갖은 조롱을 다 받았지만 6백명을 전도하여 교인이 되게 하였다. 그녀는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으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를 안 후로 나는 자주적인 인간이 되었다."라고 고백하였다. 전도부인들에 의해 기독교의 복음은 지방으로 널리 확산되었고, 국내는 물론 만주, 시베리아, 몽고 , 일본 간도 지방까지 교회가 설립되어졌다. 전도부인들이 평신도 여성들로서 목숨을 걸고 복음 사역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었던 뒷배경에는 한국의 여선교회 회원들이 있었다. 여선교회 회원들은 점심을 금식하여 헌금을 모았고, 산나물 뜯기, 미역과 조개따기, 닭을 키워 달걀을 낳아 팔기, 옷 수선과 빨래해 주기, 등을 통해 선교비를 마련하였다.
한국에서 초기 여선교회 활동이 시작된 1900년 초기는 정치적으로 일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 해 갈 때 조국을 살리고자 감리교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 시위를 주도하였고 여선교회 조직을 통해 독립자금을 조달하였는데 이로인해 많은 여선교회 회원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목숨을 잃거나 가족과 건강을 잃었다. 또한 일본의 경제적 착취로 인해 황폐해 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 채영신, 김노득 등, 감리교 여선교회 회원들이 농촌으로 뛰어들어 교회를 설립하고 야학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며 농촌경제를 살리는 계몽운동을 펼치어 나갔다.
1903년 최초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취업이민이 열리게 되어 102명의 한국인들이 SS호를 타고 첫 이민을 떠났는데 그 중 52명이 감리교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하와이 이민자 중에는 감리교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있었는데 교회를 개척하였고 여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사업을 실시하였다. 특별히 하와이에 기독교 연합사업을 실시하여 독립자금 모으기, 자녀에게 한국어교육, 한국의 가난한 사람을 돕는 구제사업, 술과 담배를 퇴치시키는 절제사업을 실시하였다.
1960년도에 시작된 미국 인권운동은 미국 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의 사회선교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권운동의 결과로 1970년대에 아시아 이민의 문이 열리게 되고 많은 한국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서부와 동부의 대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 이민사회에 교회들의 설립되었다. 이러한 한인 교회가 설립되어 발전 한 뒷면에는 여선교회 회원들의 헌신이 있었다. 미국사회에서 열심히 일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하고, 교회에서 헌신의 사역을 감당해온 여선교회 회원들의 1인 3역의 삶이 오늘날 이민교회를 존재케 한 초석이 되었다.
1990년대 연합감리교회 여성국은 미국 여선교회의 선교열매로 자란 한인 여선교회를 선교의 동역자로 받아 들이는 정책을 결정 하였다. 그래서 1992년 김혜선 목사를 한인여선교회 담당 컨설턴트로 고용하였는데 김혜선 목사는 한인 여선교회 회원들의 선교의 열정은 있으나 선교에 관한 교육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한인 여선교회가 전국 훈련 세미나를 실시하게 되었다. 1993년 첫 한인 여선교회 전국훈련세미나를 시작으로 2007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14년동안 한인 여선교회는 놀랄만한 성장과 발전을 이룩해 왔다.
전국훈련세미나를 통해 지도자 선교훈련을 받은 여선교회 회원들은 개체교회에서 UMW에 가입한 후, 지방회, 연회, 지역회에서 임원과 이사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2004년 뉴욕 연회 김경자 이사가 동양인으론 최초로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 여성국의 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120여 년 전 미국 여선교회가 세운 '이화학당'의 졸업생이 여성국의 회장이 된것이다.
한인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는 더욱 발전하여 2003년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여 UMW 선교를 후원하며, 개체교회가 원하는 다양한 전국 훈련 세미나와 선교사역을 실시하고 있다.
특별히 아시아의 여성들을 위한 '전도부인' 사역이 대표적으로 전도부인 훈련, 선교돼지 보내기, 재봉틀 구입, 선교 소 보내기, 문맹 퇴치와 건강 위생교육, 등을 통해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 있다.
백년전 미국 여선교회가 뿌린 선교의 씨가 자라 열매로 돌아온 한인 여선교회는 더 이상 도움을 받는 입장이 아니다. 선교의 열매는 또다른 선교의 씨를 가지고 있는데, 한인 여선교회 회원들은 선교의 새 역사를 창조하라고 하나님으로 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들이다. 한인 여선교회는 UMW와 함께 물질로서, 시간으로, 기도로, 재능으로 여성과 아동을 위한 세계 선교에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에 나가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김명래 전도사
(한인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